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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때 잘나가는 회사의 직원 봉급을 너무 많이 주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다고 한다. 위화감을 키울 것이라는 게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웃기지 못하는 일인가. 의대증원 논란에서 일부에서는 의사나 검사 등에 대한 국민들의 질투와 시기가 그 증원 배경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특히 삼성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한 반기업정서에는 어쩌면 질투심이나 시기가 있을지 모른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때같이 그들이 돈을 많이 못벌게 하는게 해결책일까. 그렇다고 야당 집권이후, IMF체제가 들어선 이후의 상태처럼 모든 것을 자유롭게 놔둘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우린 자기 자녀가 공부를 잘하는데, 질투하지 않는다는 데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즉 공동체의 결속력이 강화되면, 구성원의 이익이 나에게도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인식하면 질투나 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이 뭐길래, 이름만 날리면 한편당 수십억가는 시대에. 도대체 그림을 보면, 만병이 치유되고, 장수하게 되는걸까. 노래 한곡 만들어 자산가가 되는 사람들도 있지. 그런데 나는 불완전하지만, 새로운 공식을 계속 만들어가지만, 왜 무명의 가난과 외로움은 더 깊어만 가는지. 도대체 유명인의 글속에는 무언가 숨어있는 코드가 있는걸까. 그 글을 읽으면, 질병이 치유되고 새로움 삶이 열리는 것일까. 서울대 나온 사람이 하늘이 노랗다고 하면 철학적이라고 여기고, 3류대 나온 이가 하늘이 노랗다고 하면, 맨날 술에 찌들려 살아 그렇다고 할 사람들아. 유명인이 쓴 글이라 교수여서 박사여서 쓴 글이라 여기고 읽는 마음을 갖고 무명의 글쟁이들의 글도 읽어보라. 숨어있는 진주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난 어떤 글을 써도 그림값과 같은 수십억을 벌수 있는지 알길이 없어 슬프다.
지금 필자는 25만원을 준다면 정말로 고맙게 받을 것이다. 하지만, 여당의 감세 기조와 야당의 소비지원금이 결합되면, 미래세대에 대한 착취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야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누군가 빚이란게 미래소득을 끌어당겨와 소비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미래소득은 청년들 미래세대의 몫인데, 그거을 끌어다, 현재세대가 쓰는 것이란걸 알아야 한다. 결국 보수와 진보의 잘못된 만남, 야합이 곧 미래세대에 대한 착취로 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야당은 종부세를 손본다면서 소비지원금을 강행한다고 알려져있다. 적어도 소비지원금을 강행하려면, 현재세대의 세금으로 재원을 마련해야할터, 부유세를 도입하자고 하며 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와 반대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이 지독한 무명의 가난과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서,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어느덧 눈도 늙어, 책도 가까이서 볼 수 없고, 친지와 이야기를 하다가도 몇번이나 단어가 생각안나 그거 뭐지를 반복한다. 그런데 정말 시간이 비가역적이기에 노화도 비가역적일까?. 한 유명한 물리책의 제목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은 변화의 방향, 힘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속도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사물이 변화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 자체가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방소멸대응책중 출산률제고 다음으로 좋은 방법은 웃기는 이야기지만, 전국을 서울시에 편입하는 것일 것이다. 이게 우스갯소리지만,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든다면, 분명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다. 또 요즘 언론보도는 (산술)평균소득을 주로 다루지 않고, 중위소득을 다룬다. 그게 변화하는 시대상(소득 차가 심해진 경우)에 따라, 수치를 바꿔 적용해야 하는 것으로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방소멸에 대응해 관광객유치에 발벗고 나서는 지자체도 있고, 특히 서울시같은 경우는 거주인구수는 경기도보다 작지만, 여전히 수도권의 생활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잘 반영하려면, 이제 인구수와 인구밀도보다, 유동인구수가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뛰어난 학업성적을 보이지 못했던, 전문가도 아닌 필자가 교육에 대한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우습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은 기득권자가 아닌 피지배자가 일으키는 것은 노동자를 주도세력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따라서 학창시절 영재나 수재는 조력자일 수밖에 없다. 필자와 같은 3류 인생이 들고 일어서야만이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수학 교육은 타고난 영재가 아니라면, 시중에 나와있는 기출문제를 반복해서 푸는 학생만이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가 있다고 본다. 과거에도 지적했듯이, 3차방정식에서 근을 찾는 법은 인수분해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교육이다. 하나의 근을 알면 인수분해가 쉽게 되겠지만, 하나의 근도 모른다면, 어떤 1차식으로 나누어볼 것인지 생각해보라. 소인수분해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소인수를 알면, 나눗셈을 해서 다른 소인수를 찾기가 쉽다. 그러나 어떤 수로 나눗셈을 해나갈 것인지를 가르치지 않고, 그냥 소인수분해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무명의 가난과 외로움 속에 침몰중인 필자가 투자에 대해 말한다는 게 민망하다. 하지만, 부자가 경제전문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필자같이 가난한 이들의 주장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유튜버등의 투자 권유자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값이 내릴 것 같으면 팔아라고 하는 말인 듯하다. 그것은 주가를 더 떨어뜨릴 수도 있는 말이어서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고, 심하게는 영업방해와 같은 말들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매도 기법이 투자에서 주요하게 이용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어꺠에서 팔고 무릎에서는 투자격언은 잘못된 것이다.
지금, 국민연금 개혁안은 구조적으로 가난한 미래세대의 월급으로 부잣집 노인의 점심값을 주게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득보장율을 높이지 않는다면, 빈곤 노인의 삶은 비참할 것일 뿐이다. 가장 화가나는 것은 우리나라 부잣집애들과 기득권자들은 가난한 노인을 도와주려면 가난한 너희들 돈으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난한 노인들을 그대로 놔둬라는 식이 되고 있다는 데 있다. 야당이 말한 소비지원금, 25만원 주는 것도, 구조적으로 서민들에게 거둔 돈을 부잣집 사람에게도 주는 것이냐는 의문이 있는 것이다. 즉 구조적인 문제로, 우리는 더불어사는 사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 신도의 장례식을 다녀온뒤, 성당을 다니기로 마음을 굳혔다. 슬픔에 잠길 듯한 장례식장에 신도들이 찾아와 찬송가를 부르고, 결코 망자의 가는길이 외롭지 않게 보여서였다. 그리고 망자가 천국을 갈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믿음이라도 나를 위로해서이다. 상황을 바꿔서 아는 영업직 사원은 교회도 가고, 성당도 가고, 심지어 절에도 간다고 한다. 교회 인맥 등 종교로 맺은 인연을 통해 영업을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보험 계약 등 영업의 상당수가 죵교 인맥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 같다. 특히 종교조직인 같은 종교인이라면, 서로 도와주며 사는것을 교리에 의해 강요(?)됨으로 영업이 쉽다. 종교조직이 경제사회에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의사나 전문가들은 절대 정치인으로 뽑아줘서는 안된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매우 크다. 여나 야나 정치인들이 문제해결에 나서면, 개악이 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박혀있고 국민들은 우매하다는 의식에서, 정치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방식은 곤란하다. 전문가들이 많이 알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많이 아는 것과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는 것은 다르다. 이는 의료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금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아니 돈을 찍어내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왜 국민들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기본 가치관부터 너무나 그릇된 사고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만약 국민들이 돈을 찍어내는 것을 결정한다면, 인플레션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찍자고 할 것 같은가? 우리는 한국은행의 역할이나, 금통위의 역할 모두 국민이 믿고 위임한 것일뿐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의대 증원도 전문가들의 말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할 위임자들이 나서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