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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문제다. 위기에 빠진 이를 구한뒤, 그 댓가를 받는 것과 돈을 벌기 위해 위기에 빠진 이를 구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우린 구별하기 힘들다. 의대증원 논란에서 명확해진 것중 하나가 의사들도 돈과 명예를 위해 의사가 된 것이지, 의사가 되고 나서 돈과 명예가 따라온 것이리고만 할 수는 없는것이다. 가치있는 일에 돈과 명예가 따라야하는 것이 꼭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린 가치와 돈과 명예를 같이 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론이 길다.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성적인 혈액부족 특히 혈액 최대의 공급원인 청년층의 부족에 혈액의 제한적인 돈거래를 허용하라고 하고 싶은 것이다. 일부에서, 아무리 위기상황에서도 교리상 수혈을 받지 않는다는 그릇된 종교인들처럼, 우린 혈액이 부족한데 돈을 주고서라도 헌혈자의 건강을 해치지 않는 이상 사고팔아야하는데도, 돈거래는 좋지 못한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돈을 주지않고, 국가에서 헌혈하라 운동하고 심지어, 그래도 부족하면, 반강요하다시피 헌열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돈으로 사고 팔도록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한다. 그만큼 조상들은 자원의가치를 중시한 듯하다. 그런데, 우린 학교에서 가격결정에 희소성의 법칙만을 강조하고 배운다. 특히 가치의 역설이란 단원에서는 물과 다이아 몬드를 비교하며, 공급량이 수요에 비해 많은 물이 값이 싸다고 배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개똥이 많건 적건간에 값은 개똥값이 매겨진다면, 변동이 없다는 것이다. 희소성에 따라 개똥값이 변하지 않는 것은 가치의 법칙이 작동된다는 것이다. 가치에 따라 가격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수요에 영향을 미쳐 희소성의 법칙과 가치의 법칙이 야날의 가위로 작동되어 가격을 결정한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을 할수록 외로워지는가, 외로울수록 사랑하는가. 무명의 가난과 외로움은 글을 쓸수록 심해지는가, 가난과 외로움이 클수록 글을 더 쓰게 되는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글은 쓰려고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때 하는 것. 그러나 이제 아무리 말해도 대답없는 세상에 지쳐만 간다. 누군가는 뛰어난 글솜씨를 자랑하려 글을 쓰는것 같지만, 글이 담고 있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글솜씨를 탓하기 전에 글에 담긴 정보를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난 글솜씨가 좋다느 말을 듣지 못해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기득권 사회를 파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특히 기득권 논리를 파괴할때만이 혁신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의사나 검사 앞에서는, 학교 성적순으로 주눅이 들어서는 혁신은 없게 된다. 기득권 논리를 파괴해야 어쩌면 우리의 무명의 가난과 외로움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 그러나 그러기전에 정신도 쪼그라들게 생겼다.
극단적인 야권 지지자중에는 현 정권이 실패하기를 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경제가 망가지는 것을 걱정하기 보다, 경제가 망가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쟁사회에서 남의 성공은 나의 불행이요, 남의 실패가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경쟁하며, 거시적으로 동반 성장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마치 미시적으로 가격은 수요량에 반비례하지만, 거시적으로 물가는 소득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 불신 지옥! 심지어 지하철에서도 전도한답시고, 시끄럽게 다니는 종교인들을 보면, 종교의 자유를 말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시지 않던가. 표현의 자유도 그렇다. 표현의 자유라고 해서, 확성기를 틀면 그건 소음공격이고 도발행위다. 지금, 쓰레기를 풍선에 띄워 우리의 국경안으로 넘기는 것도 치졸한 도발행위인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동시에, 대북 전단도 난 잘 몰라서 그러는데, 표현의 자유라기 보다는 도발 행위로 봐야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갈등을 증폭시키지 않기 위해, 전 국민이 정부 정책에 따라줘야 하는 것도 민주주의 사회, 자유의 덕목일 것이다. 자유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보장되어야 한다. 지금 언론 자유와 언론 탄압에 대한 논라도 계속되고 있다. 언론 자유라고 해서, 가짜뉴스나 선동질만 해대는 언론이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윤추구의 자유도 어느선에서 보장되어야 하는지 논의가 필요하다. 부동산 투기등에서 보여지는 착취나 수탈도 자유일까?
영어를 쓰는 미국인이 수능 영어를 못푸는 것을 보고 위로받는다. 시를 쓴 시인이 해당 시로 나온 국어 문제의 답을 제대로 찾지 못할때도 위로받는다. 나는 학교 성적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학교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영재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땐, 주눅이 들곤 했다. 특히 요즘같은 시기에는, 영재가 학원에서 길러진, 결국 부잣집 애들이 주로 되는 시기에는 학교 교육이 파괴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등수를 매기지 않는것이 좋은 방법일까. 결국에는 대학교를 들어갈때, 성적에 따라서 등수에 따라 들어가게 되는데 말이다. 대학교도 성적이 아닌 봉사활동이나 학교 생활만으로 가게 된다면 그렇지않아도 불공정한 세상에 얼마나 심한 불평등 사회가 될 것인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학교공부 잘하는 것보다, 착하게 사는 사람이 복받기를 바라는 마음, 마치 내가 잘못하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성공하기보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항상 상처만 받게 된다. 하지만 희망을 갖자. 예언자 같은 인물이 나타나 지금의 학교 지식이 쓸모없고, 낡은 지식이라며 교육을 파괴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관성의 법칙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는데, 하나더 생각하면 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거는 물체가 등속직선운동을 할 것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물질은 존재함과 동시에 어떤 힘이든디 갖게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라.
대통령이 발표할 정도로, 경제성이 있는(?) 석유의 발견은 엄청난 꿈과 희망을 안겨준다. 실제 실현된다 해도, 20여년 후가 될 것이지만, 주식시장은 연일 뜨겁게 반응한다. 그러나 성공하면 이 어려운 시기에 더할 나위 좋을 일이지만, 실패하거나, 저치적인 쇼(?)로 오해받게 되면 그 역풍은 더 큰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라도, 이 어려운 시기에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은 나중에 거짓으로 판단될지라도, 위약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기왕이면, 퇴행 자원인 석유의 발견 대신 다른 발견은 없었을까. 석유는 고갈의 문제보다 환경파괴적인 에너지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생각해보았다. 우리나라 수학자가 가장 큰 소수를 발견했다고 공표하면, 그 경제적 가치와 효과가 있을까.
현대에 와서 성경에 쓰여진 것과 비슷하게 예수가 나타났다는 언론 보도는 거의 없는 이유가 뭘까? 그러나 간혹 목사중에는 꿈속에서건,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상신을 믿는 사람들이 꿈속에서 얼굴도 잘 모르는 증조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어떻게 했다는 말을 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해석하는 것과 같은 확증편향과 같은 것 아닐까. 과거에 쓴 글중에서도 꿈은 흑백이다는 것도, 캄캄한 곳에서 칼러를 떠올리려면 잘 떠오르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하며, 꿈속에서 무슨 색을 보았다는 것도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게 보았다고 믿는 것 아닐까.
전문지 한 기자가 행사에 참여해, 자기가 문제를 제기했던 주제로 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자랑겸 자기가 쓴 기사를 몰라준다고 섭섭해 한다. 기자들은 간혹 자기가 왕년에 쓴 글로 법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정책이 시행됐지만, 그와 그 기사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데서 억울함(?)을 토로한다. 정치인들도 자기가 한 입법 활동이며, 지역 투자 개발 유치 성과를 적극 홍보한다. 그렇게 내세우지 않으면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북한같이 사람이름을 붙이는 것을 일상으로 하는 것도 볼썽 사납다. 우리나라도 많은 법안 이름이 일면 사건이나 사람이름으로 전해지기도 있다. 심지어, 공익에 기여한 것이 크지 않는, 아니 공익에 비해 사익을 더 크게 보았던 연예인들의 이름을 붙여 거리이름을 조성하는 것도 다반사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데, 그런 것이 인정일까. 많은 과학 및 수학의 발견에도 앞서간 천재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렇게라도 해야 발견자와 개발자의 이름을 기억해주니 물론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보다도 우리는 서로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죽어버린 뒤에 이름을 기억해주는 것 이전에 지금 살았을때, 인정해주었으면 죽어간 천재들이 정신질환과 경제적 고통속에 살아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특히 성적과 돈, 권력 앞에서만 마지못해 인정하는 이런 사회는 서로가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의사나 검사, 판사만을 경외하는 시민들은 서로의 노력과 능력, 인생을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인정못받으면서 왜 남을 인정해주려는지.
세금도 못낼 사람이 왜 수십억원에 달하는 집에 사는가. 특히 소득이 없는 사람들이 출퇴근이 쉽고, 회사가 밀집한 지역에 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알박기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부동산은 공산품과는 다르게 완전대체가 되지 않는다. 교통통신의 발달에 완화될 수는 있지만, 주택은 위치하는 자리에 따라 더 비쌀수도 있고, 더 쌀 수도 있다. 필자는 은퇴한 노인들이 강남 등 고가 아파트에 거주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동산이 완전대체품이 될 수 없는 공산품이 아니게에, 고소득일때 얻은 왕관을 죽을때까지 들고 살려는, 결국 자녀에게 상속하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팔고 좀더 싼 지역으로 이동해서 팔고 사서 남는 돈으로 생활비를 쓰게 하는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세제건 금융정책이건 정부가 유도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