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이고통이 사라질까. 진독한 가난과 외로움의 끝은 결국에는 파산이고 죽임일 것인데, 하루를 더 연장해보겠다고 버텨본들 무슨 소용인가.젊은 시절에는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마치 시대의 최종 답처럼 느껴졌다.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참여, 더 많은 목소리.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선(善)처럼 보였고, 그 이름 앞에서는 다른 가치들은 쉽게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어가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걸 보게 된다. 민주주의가 항상 ‘가치의 확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때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한때 민주화의 열기가 가장 뜨겁던 시절, 군부 독재의 잔재를 걱정하던 사람들은 오히려 또 다른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 흐름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 말은 당시에는 기득권의 불안으로만 들렸지만, 지금 돌아보면 사회 각 영역에서 다양한 요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아파트 건설이 추진되면 기존 거주자들은 반대한다. 개발은 필요하지만 내 집 앞은 안 된다는 목소리가 충돌한다. 노동운동 역시 더 넓은 연대보다는, 조직 내부의 이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사회 전체의 균형과는 다른 방향으로 힘이 작동하기도 한다. 각각의 요구는 나름의 정당성을 갖지만, 전체를 하나의 그림으로 놓고 보면 종종 서로를 밀어내는 방향으로만 흐르기도 한다.
젊은 시절 진보적 가치에 공감했던 한 선배가 TV 속 판결을 보며 내뱉던 말도 떠오른다. “왜 저런 사람들까지 저렇게 보호해야 하는가.” 그 말에는 분노와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사회가 지켜야 할 인권의 기준과, 사람들이 체감하는 정의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자주 벌어진다.
극단적인 범죄나 사회적 약탈 행위에 대한 강한 처벌 요구가 등장할 때마다,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법과 정의, 인권과 응보 사이의 균형은 어디에 있는가.
문득 과거의 어떤 제도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속 시원함”의 문제로 환원할 수는 없다. 사회적 불안을 강제로 눌러버리는 방식은 언제나 또 다른 부작용을 남겼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처벌의 강도가 아니라, 왜 그런 현상이 반복되는지에 대한 구조적 이해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민주주의는 완성된 상태라기보다, 계속해서 시험받는 과정에 가깝다. ‘모두의 참여’라는 이상이 실제 현실에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충돌로 나타나고, 그 충돌은 종종 가치의 문제라기보다 이익의 문제로 번역된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이런 생각이 스며든다.
민주주의가 최고의 가치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언제나 타당한가, 혹은 우리는 그것을 너무 단순하게 믿어온 것은 아닌가 하고.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다. 가치는 단순히 돈이나 소득으로 환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개발과 재건축, 성장과 분배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는 기회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을 밀어내는 변화일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많이 얻는가”만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아마도 완벽한 답이 아니라, 끊임없이 조정되고 재해석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마주하게 된다. 군부독재시절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도 잡혀갈사람이 아닌데도 잡혀가는 것등이 잘못되었지만, 지금 국민들은고리사채업자, 약탈꾼들, 조직폭력배들은 삼청교육대라도 집어넣으면 얼마나 시원할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난 결국 파산을 맞이하고 있다. 아 그것이 한스럽다. 난 가치있는 혁신의 글을 쓴다고 했지만, 지금의 광고 수입으론 살아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