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이 지옥같은 가난과 외로움을 주었는데도, 찬양해야 하나. 평생 살아오면서 단 한번이라도 나의 기도, 나의 바람을 들어주었는지 생각해보라. 이건 편애다. 누군가는 욕망을 들어주셨다는데, 난 욕심도 아니고 그저 남들처럼 살게해달라는 욕구를 기도하는데도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는 하느님. 편애 아닌가. 난 이렇게 힘든데, 사이비 진보들은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는 이 판이 너무 싫다.
다음은 챗GPT가 리라이팅해준 글이다.
반공을 삶의 중심 가치로 삼아온 시간은 한 개인에게도, 한 사회에도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로 남는다. 냉전의 긴장 속에서 형성된 사고방식은 단순한 정치적 선택을 넘어, 세계를 해석하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그 기준은 धीरे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보 세력이 집권하거나 사회적 갈등이 격화될 때마다 등장하는 ‘실리주의’라는 말은, 어느새 반공을 명분의 자리로 밀어내고 자신을 현실적 선택의 언어로 자리잡게 했다. 그 결과, 과거에는 이념으로 간주되던 진보가 오히려 실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역전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시장자유주의 역시 결코 ‘실리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 또한 하나의 이념이며, 선택된 가치체계다. 흔히 자유시장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논리가 곧바로 실익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해지지만, 그것은 특정한 전제 위에서만 성립하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한미동맹 역시 단순히 명분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 관계가 지속되는 이유는 분명히 상호 간의 이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명분과 실리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현실 정치 속에서 긴밀히 얽혀 있는 요소들이다.
외교에서 실리주의는 특히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접근은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원칙과 신뢰를 훼손한다면 장기적으로 더 큰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 최근 국제정치에서 나타나는 강경한 자국 중심 외교, 이른바 거래 중심의 외교 방식은 이러한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모든 관계를 ‘이익의 교환’으로만 환원할 경우, 협력은 쉽게 경쟁으로 변질되고, 신뢰는 협상의 도구로 전락한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이해관계의 조정 과정이다. 정치인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반드시 상대의 이익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일방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려는 정치 구조는 결국 갈등을 심화시키고, 사회 전체의 안정성을 해친다. 상호이익이라는 최소한의 기준이 지켜질 때에만 정치적 타협과 협력이 가능해진다.
이 지점에서 ‘명분’의 역할이 다시 중요해진다. 명분은 단순한 도덕적 장식이 아니다. 이해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공동의 기준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실리가 충돌할 때 명분이 없다면, 남는 것은 힘의 논리뿐이다. 반대로 명분만 있고 실리가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구호에 그칠 뿐이다.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명분과 실리가 균형을 이루는 정치다. 단기적 이익에만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 성과를 외면하지 않는 접근. 상대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지혜. 그것이야말로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시대에 요구되는 정치의 모습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념과 실리를 단순히 대립시키는 프레임을 넘어, 두 요소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