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부는 거리를 나가면, 눈물이 줄줄 흐른다. 언제부턴가 눈물흘림증이 계속되고 있다. 너무 슬플땐, 헛웃음이 나오는 것처럼, 너무 기뻐 박장대소하면, 눈물이 나는 것은 왜일까. 웃는 것과 우는 것이 완전 대체가 아니기 떄문 아닐까. 카드값을 이리저리 메우기 위해, 지난 1년을 애를 태우며 보냈다.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계엄령을 내렸다는 말을 보면,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완전 대체로 보는 극단적인 세력들이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론이나, 사람들은 좀더 강한 말, 좀더 과격해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적절하게 수위를 조절해서 하는 말은 시원하지도 않고, 답답함만을 주는 것 같기 떄문이다. 사회가 각박할수록 과격분자들이 더 날뛰고, 그들이 각광받는 것은 모두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건 여당뿐 아니다. 야당도 사이다같은 말을 자꾸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자유경쟁, 각자도생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시장경재에서 왜 보험이 각광을 받는가. 그건 혹시 보험이 각조 있는 연대에 의한 위험 분담떄문 아닐까. 우린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기 전부터, 근대적인 향약과 계 등이 사회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려울때 십시일반 도움주는 정신 그것을 보험이 포용하고 있는지는 않는지 생각해보란 것이다.
필자는 반기업 정서로 보험의 가치를 폄훼해서는 안되다고 생각한다. 저축에 비해 보험은 각자도생이 아닌 연대의 정신을 담는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보험의 기법을 활용해, 우리사회의 위험을 서로 나누어 분담할 수 있고, 보험을 통해 최과 이윤을 까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정반합이 아니다. 우린 사상이든 주의든 자본주의와 종교관계든 요철식의 보완적 관계를 형성하는 게 사회발전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무한 경쟁사회에서 우린 왜 협력을 강조하는가. 무한경재사회에서 지금 종교 정상 아닌데가 문제지만, 더불어 이웃과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필요한가. 그건 요철식의 보완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각자도생 사회에서는 보험을 강조해 연대를 도모하고, 종교가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역할을 함으로 우리사회는 안정적이 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좌파의 씨를 말리는 게 아니라, 하위에서 좌파들이 자유경쟁의 그늘을 따뜻하게 하도록 북돋워줘야한다고 보는 것이다.
우린 지금 힘들다. 각박하다. 이럴때일수록 보험과 종교의 역할이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반기업 정서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된다. 정부가 공짜 의료를 달성하려는 욕심을 부리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도 민간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보험료를 지우너한다면 어떨까. 정부주도가 시장경제보다 더 빨리 호가실히 성과를 달성하는 것에는 핵심이 규모의 경제에 있다. 모든 사람들이 민간 보험을 들면, 민간보험사도 규모의 경제 실현으로 수익을 낼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의 무상의료를 실현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봐라.
가령 치아보험만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은 민간의 지원을 받다 가입한다며녀, 임플란트는 진작에 나이에 상관없이 공짜가 도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지금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