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는 신종코로나에 감염되는것보다, 격리 자체를 더 두려워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물론 그들이 신종코라나 감염증을 무시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희귀하지만 죽음보다 사는게 더 고통스러운 이도 존재하듯이 사람은 남의 떡이 크게 보이며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어쩌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신종코로나19사태로 경제적 위기를 겪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재난기본소득도 근거가 빈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신종코로나19사태도 처음겪었지만, 그 경제적 대책으로서도 처음 시도하기 떄문이다. 사실 가벼운 질환을 앓아본 사람들은 간혹 느끼는게 있다. 한 지인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 과거에 열나고 목이 아파 동네 의원을 다녀온뒤, 의사들이 목을 살펴보고 증상을 물어본뒤 약을 처방하는 과정 모두가 신통하기 짝이없다(좋게도 그렇고 부정적으로도)고 말했다. 무슨 말이냐면 상당수 진단과 처방 과정은 근거를 넘어 과학적 상상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만큼, 세상은 근거, 특히 과거의 경험만을 가지고 헤쳐나가는 경우가 의외로 적다. 과거의 대응방안을 현실에 맞춰 응용하고 창의적 혁신을 통해 대처하는게 더 많은 것이다. 재난기본소득은 수요를 지원하는 제도중에서도 더욱도 투자가 아닌 소비를 지원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유효수요는 살수 있는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려는 욕구라고 한다면, 투자와 소비로 구성되어 있고, 진난 세기의 모든 유효수요 정책은 엄밀히 투자지원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투자는 현시기 소비이며 수요이지만, 미래시기에는 공급이 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유효수요진작책이 기업지원으로 변용되었던 것도 부장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소비의 주체인 가계는 기업의 투자에 의해 수입을 만들게 되지만, 재정정책이 가계 지원이 아닌 생산주체인 기업 지원에 치중함으로 비대해진 기업에 비해, 가계는 상대적으로 부실해진 것도 사실이다.
돈이 기업에 지원되면, 기업에서 가계로 요소소득이 이동하여, 그 돈이 생산물품을 소비하는 돈이 되어야 하지만, 가계의 요소소득, 이자나 지대는 이미 역으로 가계에서 기업으로 이전되는 소득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물론 근로소득은 가계의 요소소득의 첫번째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동시에 근로소득은 임금와 자영업자의 영업 소득을 모두 포함한다.
재난기본소득의 역사적 의미는 사실 별게 아닌 것이 아니다. 만약 효과가 성공적으로 평가된다면, 우리는 역사의 새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앞서도 지적했지만, 그 재원을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마련하느냐에 관심으로 두어야 한다. 간접세나 벌과금위주의 재정 상황에서는 자칫, 서민들에게 돈거둬 부자에게 돈을 지원하는 제도가 되어버리는 꼴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염보다 격리가 더 무서운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 데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시기다. 한편 발열이 외부물질을 죽이기 위한 반응이라면, 재채기와 기침 또한 호흡기에 들어오거나 들어있는 외부물질을 배출시키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재난기본소득이 이상한 제도로 반응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과거의 재정정책이 잘못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