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부터 우리 사회에는 정치적인 또는 사회적인 중립을 요구받는 전문인이 많다. 하지만, 어떤 행동과 말이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매우 어렵다. 흑백논리를 넘어 다양성 사회로 나아가는 것으로 외견성 비치자, 선악구분이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국어에서도 틀리다는 말과 다르다는 말을 구분해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틀리다는 말과 다르다는 말을 구분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 가령 1더하기1은 2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을 참과 거짓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철학자 과학자 정치인 경제인이라면 오히려 참 거짓으로 답을 매길 수 없다할 이가 많을 것이다.
또 경제적인 면에서도 상품이 고가 상품과 저가 상품등 수없이 많아지자 이를 두고 다양성사회라고 섣불리 진단하는 것처럼, 무모한 일은 없을 것이다. 즉 양극화인지, 다양성인지는 그렇게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강남 아파트가격과 지방 아파트 가격의 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쉽게 다양성이 아니라 양극화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상품이 고가 상품과 저가 상품으로 구분되는 것만으로는 다양성으로 간다고 말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에서 다양성인지 양극화인지 어거지로 구분한다면, 가격 차별과 제품차별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교육의 정치적 중립은 과연 무엇일까? 옳은 주장과 틀린 주장에서 중간 입장을 취하는 것이 중립일까, 또 해당시기에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균형추 역할이 중립자의 자세가 될 수 있을까?
그럼 균형이란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철학적 가치관을 실리적으로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익과 공익의 갈등에서 수많은 판결은 사익과 공익의 최적 균형을 이루는 관점을 취하거나 당위론적으로 취하는 게 옳다고 본다. 착각하는 것이 최대다수의 행복이라고 해서 사익을 누르는 것도 중립이나 균형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당신에게 노동과 자본의 투입량을 결정한다며, 노동의 한계 수익과 자본의 한계 수익이 균등하게 결정하면, 최대수익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충분히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익과 공익의 선택, 사익과 다른 사익의 선택은 한 편의 주장을 실해했을때 발생하는 한계 효용(수익)과 다른 편의 주장을 실행했을때의 한계 효용(수익)을 균등하게 해주는 선택이 균형이자 중립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선 글에서 기계적 표절, 글자의 몇 %를 표절했는지를 따진 것의 문제점을 지적했듯이, 지금 우리의 중립적 관점은 기계적인 중간자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린 재정 정책 뿐 아니라, 금융정책마저도 정치와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동산 정책만 하더라도 세제와 관련 찬반이 있을 수 밖에 없고, 부동산 가격 상승의 폐해와 상승했을때 이익을 보는 자들의 이익을 비교 검토해서 균형있는 주장을 해야 중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부터는 고등학교 3학년 또래들도 투표권을 행사한다. 교육이 정치와 무관할 수는 없고, 정치관련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중립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중립에 대해 우린 깊이있는 논의와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