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가르쳤지만,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오직 먹고 살기 위해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서민들은 이중적이다. 졸부들을 부러워하면서 졸부들을 손가락질하는 서민들은 무수히 많았다. 우리 주위에는 부동산 졸부들이 흔했다. 아니 지금도 생각보다 많다.
정말 힘뜰땐 그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술 좌석에 가면 술기운에 애국심이 발동되어 그들을 욕하며 서러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런 부자들이 많다보니 능력과 노력에 의해 부자가 된 사람들도 도매금으로 욕을 얻어먹기 십상이다. 더욱이 지가 무슨 수로 그 많은 돈을 벌었냐며 수근덕거리기 일쑤다. 졸부들은 귀가 가렵지도 않나보다. 그들은 많은 서민들의 부러움만 안고 사는 것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천민적 자본주의를 임의로 정의내린다면 가치증식없는 돈만 밝히는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밑바닥에서 증식시킨 가치를 자산가격 등으로 앗아가는 이들이 천민이고 그들이 사회의 주류가 된 세상을 천민적 자본주의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따라서 직업에는 귀천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간혹 사람들은 기름밥을 먹고 산다면, 자신의 직업을 낮추어 말하는 기술자들을 본다. 3D업종 중에 많은 분야는 사회적 분업에 의해, 누군가 해야할일을 맡아서 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일로 그들아 증식시킨 가치는 그들의 댓가인 가격보다 훨씬 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말한다면 맞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직업이란 사회적 분업화로 자신이 맡은 부문의 일이기 때문이다.
분업이 협업과 구분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어거지로 구분한다면 협업은 평등한 조건에서 업의 분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협업 사회로 간다면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교육은 철학의 빈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중고등교육과정에선 직업에 귀천이 없다하고 대학에 가면 예컨데 경제학만 하더라도, 기회비용을 설명하면서 오늘 놀지 않고 그 시간에 공부를 하면 조금 더 나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등의 설명을 하기 일쑤다.
교육 철학의 모순은 비단 이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이중성에 내재되어 있다.
지금이라도 경쟁의 규칙을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가치 증식없는 가격추구는 미래 사회의 경제 윤리에 크게 어긋나고 반칙이라고 합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