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를 간략하게 말한다면, 소비욕망과 구매력의 불일치로 말할 수 있다. 물건을 사야할 사람은 돈이 없고, 물건을 가지고 있는자가 물건도 돈도 다 가지고 있으니 소비(투자)가 늘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돈이 없는 이들에게, 돈을 준 것은 소비지속및 소비확장을 위해서 불가피한 것이고, 정치 경제 지도자들이 기부하면, 소득(부)재분배를 하면 복받는다고 말해야 한다.
시장경제가 합리적 생산과 소비활동을 근거로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합리성은 경제 유지 발전에 큰 밑받침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종교인들은 합리성을 지지하는 것일까 이다. 더욱이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우파건, 비판적지지를 하는 좌파건 그들은 합리성을 지지할까?
경제적으로 보면, 종교인이건, 우파건 좌파건 원칙과 원리를 강조하는 사상가라면 합리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제적 판단을 보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경제에서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말하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성과 진리를 탐구하는 데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면 왜 우파도 비합리적일 수 있다고 하는가의 문제는 원칙과 원리에 입각해서 미시적 개별적 행동까지 규제하는 경우에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반공을 내세운 정책과 개별적 미시적 행동은 부자연스럽고 합리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은 청장년층은 쉽게 이해할 것이다. 일부는 -주의로 세상을 끌어가면 안된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도 그런 이유라고 보아야 한다.
필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합리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보인다. 시장경제에 대한 거부감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경제적 합리성을 잘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합리주의가 역사에서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선택하게 했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합리주의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거시적 원칙주의가 선택하게 했다고 보아야 한다. 물리적 전쟁을 택한 것은 냉철한 이성적인 합리성에서 나올 수 없다고 보기 떄문이다.
시장경제는 동정의 원리가 보충한다고 하는데, 만약 진정 합리주의를 다시 생각하면, 기부나 소득 및 부의 재분배는 지속가능한 경제, 경제 성장을 위한 실익이 있는 선택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합리란 말의 정의가 저마다 다르다. 누구의 정의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말장난에 빨려들어갈 수 있다. 특히 그것을 보고 정치 사회 논쟁을 한다면, 혼란에 빠질 것이다. 말의 취지를 이해하는데, 노력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