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력한만큼 인정도 댓가도 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갈등의 본질은 좌파냐, 우파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정과 댓가의 문제다. 공정성의 본질은 종교적, 이념적 평등이 아니라 제 댓가가 지급됐느냐이다. 부모의 ?으로 부와 권력을 차지하지 않고, 노력과 능력에 맞춰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 자본과 권력의 댓가는 사람들의 피와 땀보다 더 값어치를 쳐주는 사회에서는 언제까지나 공정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특히 내부의 단결을 위해 외부의 악마를 만드는 일은 고급스러운 국제정치에서만 있는게 아니다. 친구사이에서도 국내 정치 계파간에도 흔히 있는 일이어서 경계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경제 위기 때는 항상 진보주의자들의 문제로 치부해 왔거나, 요즘엔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들을 악마로 규정해 그들을 비판하면서 위기를 지나간다.
그러나 그들은 돈의 흐름을 좌우한 적도 없고, 돈이나 권력을 가져보지도 못한 무지랭이들인 경우가 많다. 많은 이들이 분노에 치달을때, 누군가는 악마가 되어주어야 하고, 그 분노의 화살을 그리 향하게 하는 이들이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라. 지금 최대의 문제는 저출산 고령사회로 진입하면, 경제가 위축될 수 있는 상황이며 특히 이런 문제는 양극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양극화중에서도 제 댓가의 적정성 문제가 있음을 서로가 인정해야 한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3류대 졸업생이라고 따지를 붙여 댓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명문대 졸업생 등 엘리트들을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각고의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엘리트들은 그 자리에 가기 위해, 명문대 입학과 졸업 등 수많은 세월을 노력해왔지만, 사람들은 엘리트들이라고 과거만큼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들이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은 이들을 인정해줄리 만무하다.
그러나 인정 자체만으로도 댓가에 들어간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지 못하는데, 누가 그들의 장사에 돈을 댈것인가? 어떻게든 후려치는 것이다. 지금 언론에 대한 불신도 결국은 언론들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에 대해 말하지만, 언론은 비판이 생명이 아니다. 언론은 정보를 생산가공전달해서 수익을 내는 사업체이다. 언론의 비판기능은 정보 생산의 하나로 문제제기 수준인 것을 말한다. 구시애의 시각으로 언론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대안을 제시하는 언로이 그보다는 진보된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세상은 험악해졌다. 언제 누가 악마가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누구도 믿지 않는 악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