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물리학책을 읽어보면, 생명은 외부와 물질을 주고받지만, 무생물은 힘만 주고 받는다고 적고 있다. 과거 학생운동권 중에는 진화론 및 유물론 관련 서적을 읽고, 동물을 고깃덩어리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농담이겠지만, 생명과 무생물의 정체성을 구분치 못한 경우는 실제 많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이 없다는 세상에 들어서며, 허무함을 느끼거나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늘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기사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세계적인 물리학 천재가 말한 생명의 정체성과 유사한 이야기도 있다. 역시 시간관련 세계적 물리학자의 다른 책은 시간에 대한 관점을 설명하면서 생명의 정체성을 사건의 상호연관성(관계에서)에서 찾는 듯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신의 존재 유무를 논한 과학자들이 아니란 점에서 진화론자에게건 유물론자에게건 우리에게 보다 나은 시각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들의 시각을 연장해서 수필이라도 쓴다면, 사랑이란 욕망은 물질을 공유하고 느낌과 감동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사회는 카르텔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친해지고 싶은 경우에는 밥을 사는 경우가 많다. 비록 더치페이가 새로운 문화가 되고 있다고 하지만, 한 탁자에서 같은 물질을 먹는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서로 친해지고자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사랑하는 이라면 밥을 같이 먹고 공통의 추억(기억)을 간직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 유명한 소설가가 소설의 목표가 거짓을 통해 진실(진리)을 밝히는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예술이란 진리 추구의 한 수단으로 느낌과 감동을 공유하고자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돈에 대해 빼고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돈을 벌라고 말한다. 고상하고 고리따분한 철학자 같이 사회에 가치있는 일을 하라고 하는 이는 거의 없다. 문제는 돈을 버는 것이 가치와 가격이 조화를 이뤘다면, 이 두 말은 서로 같은 말이 됐겠지만, 그렇지 못한다.
우리 주변의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을 전해 듣기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들의 예술활동이 사회에 얼만큼의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지 난 솔직히 모른다.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제 댓가를 받지 않는 이들의 아우성이 넘쳐난다. 그것은 시장에서 노력과 능력 등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예술가들을 별도로 육성하고, 돈벌이를 보장하는 방법도 최선은 아닌듯하다. 지식인들도 생각해보라. 수많은 학교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시간강사며, 우리 주변의 기자 등의 글을 쓰는 수많은 이들도 정부가 돈벌이를 보장해줘야 한단말인가. 정부가 하려면 결국은 선발해야 하는데, 누구를 밀어줄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공통된 여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 일부 예술가나 지식인들은 부모를 잘만나, 돈을 물려받고 권력을 행사할 자리를 물려받았고, 돈버는 일 따로, 예술 활동 따로하면서도 충분히 잘 살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가 감동만큼 돈을 알아서 지불하는 시대를 그려볼 수가 있다. 물론 지불하는 가격도 다 다르게 된다. 규모의 경제 너머에는 동일노동 동일가격을 넘어서 가치만큼 가격을 지불(굳이 이름붙이자면 동일가치 동일가격)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차원 다른 세상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과학도 경제도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써놓고도 주제넘은 글을 썼다고 할까봐 게재를 망설였다. 그냥 한번정도는 읽어주고 넘어가면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