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차별의 합리화 절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차별은 차별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비합리적 차별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특히 차별을 개선하는 노력이 차별의 합리화가 아니라, 종교적인 또는 정치적 이상(공상적인)인 평등 논리인 듯해, 그에 대한 역차별이 새로운 아픔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명문대 졸업생들에게 특혜를 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비명문대생들과 무차별해야 한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세상에 직업은 다양하다. 지식이 집적된 직업도 있고, 자본이 집적된 직업도 있고, 단순한 노동이 집적된 직업도 있다. 저마다 직종에 적합한 인재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졸 신화를 그리워한다. 학교에서 길러진 인재보다도 독학으로 이 사회를 바꾸는 지혜를 습득한 사람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고졸신화의 세대는 지나갔다. 지금 우리 자녀들의 70-80%가 대학을 다니고 있으며, 대학은 서열화되어 있다. 그리고 대학을 나와 성공할 확율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 성공할 확률보다도 당연히 높다.
문제는 능력위주의 사회를 기대한다면, 능력에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신분이나 학벌 등에 따라 대우를 해준 것이 아니라 능력에 맞는 대우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부 사회의 지도자들은 여론을 호도하지 않아야 한다. 학교 공부에서 낙오한 자들을 위해, 우수한 성적을 지닌 이들을 깍아내리는 행위는 냉철한 사회로 들어선 순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명문대생의 글이 한 일간지에 보도된 것을 보라. 그는 자신의 인생이 허탈하기까지 하는 듯한 글을 썼다. 그건 왜일까? 승자독식사회이기 때문이다. 그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않지만, 보상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하는 이라면, 다른 지식인의 책을 사서 읽어보았을 그서으로 추정한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다른 지식인에게 금전적으로 지원을 했던 것이다. 그가 지원한 지식인이 사회 여러방면에 우수한 지식은 눈에 보인건 보이지 않았건 보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더 중요하게는 지식에 대한 댓가는 지식 생산자와 그 댓가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한 특정의 상품에 들어간 지식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식이 하나하나 보태졌지만, 아니 슈펀맨같은 지식인이 아니고서야 그의 지식도 여러사람들의 지식이 융복합된 것이지만, 몇까지를 빼고는 상품화에 성공한 사람이 그 융복합된 지식의 댓가를 거머쥐게 되는 것이다. 승자독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식 사회에서도 승자가 되지 않는 지식인은 제 댓가도 받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선 인정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엘리트 카르텔을 형성하라 할 수 없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교육정책의 완전한 재정립을 요구하고 싶다. 한 자사고 취소와 부동의 과정을 보면서 어떻게 100년지 대계라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대학구조조정은 정말 이상하기 짝이없다. 왜 지방대를 유지하려 하는지, 마음을 비우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전국 어디로 가서도 학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인서울 및 수도권 학생수를 줄이고 지방배 학생수를 그만큼 덜 줄인다면, 학생들이 선택하고 싶은 학교가 아닌곳으로 다니라고 하는 것과 같은 논리가 되지 않는가 말이다.
마치 고졸신화를 보고 싶으니, 대학을 없애고 고졸로 취업하라고 독려하는 이상한 심리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자기 자식에게는 고졸만 되도 된다고 할 부모가 우리나라에 몇 %가 될 지 생각해보았는가? 앞서도 말했지만, 고학력자가 성공할 확률이 저학력자가 성공할 확율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저학력자중에서도 신화같은 인생을 산 사람도 없다고 할 순 없지만 말이다.
특히 고졸 및 2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들과 약대 6년제, 로스쿨 4+4년제의 시행은 우리사회가 학력 격차를 가속화시켰는지 생각해보고, 학벌철폐 이름으로 눈속임을 하지 말라하고 싶다. 차별없는 사회란 구호에 이제 넘어갈 국민은 없어져간다. 종교적 정치척 평등사회의 실현은 이상으로 남기고, 차별을 합리화시키는 현실적 목표에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임금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제로 차별의 합리화를 꾀한다면, 많은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