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급여 수급자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정률제 도입을 철회하라
현재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저소득층 의료보장제도인 의료급여의 본인부담체계를 개편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핵심은 기존 외래 본인부담 정액제를 정률제로 변경하는 것이다. 진료비의 일정 비율(4~8%)을 환자가 부담해야 하는 정률제가 도입되면 수급자들의 본인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고, 이는 의료이용의 경제적 접근성 저하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복지부는 지난 17년간 본인부담금 동결로 인해 수급자의 비용의식이 약화되어 ‘불필요’한 과다의료이용이 양산되고 있다며 정률제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번 의료급여 정률제 도입은 가난한 이들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개악’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첫째, 정책 목표와 수단이 서로 맞지 않는다. 수급자 중 상당수는 의료필요도가 높은 노인, 장애인, 환자 등이라는 점에서 건강보험 가입자에 비해 의료이용량과 진료비 지출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과다’ 의료이용이 발생하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설사 복지부 주장대로 부적절한 과다이용 문제가 존재한다고 보더라도, 이 경우 해당되는 문제 해결에 적합한 수준과 방식의 정책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복지부가 그간 과다이용의 대표 사례로 제시했던 물리치료가 포함된 외래진료의 경우 진료비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에서 정률제 도입에 따른 이용억제 효과 역시 상대적으로 크지 않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반면, 외래 진료라 할지라도 질환 중증도가 높아 고강도 치료가 요구되는 사례들이 존재하는데, 이 경우 더 큰 진료비 지출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정률제 도입에 따른 비용부담 증가가 상대적으로 더 클 수밖에 없다. 즉, 정률제는 의료필요도가 높은 이들의 의료 이용을 한층 더 제한할 수 있는 모순된 정책인 것이다.
둘째, 정률제 도입이 수급자의 의료접근성과 그에 따른 건강 결과에 미칠 영향에 대한 검토가 미흡하다. 복지부는 기존 본인부담상한제(사후 환급)와 건강생활유지비 인상 등을 감안하면 본인부담 증가분이 크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정률제가 필요한 의료이용을 제한할 수 있는 위험성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개별 수급자들은 의료 필요를 느꼈더라도 내원을 결심하기까지 많은 요인을 고려하게 되는데, 자신이 부담해야 할 의료비에 대한 예측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정률제는 이러한 예측의 불확실성을 높임으로써 가용 자금 여력이 부족한 수급자들이 의료이용을 주저하고 포기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그런데 복지부 계획에는 이러한 ‘심리적 장벽’에 대한 고려와 대안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비용부담의 증가 여부와 크기를 논하기 이전에 ‘정률 부담금’’이라는 비용 부과 방식 자체가 의료급여 제도의 기본 취지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진료비가 많이 나올수록 더 많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은 전형적인 시장 원리에 기초한 방식이다. 건강보험료와 치료비를 부담할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을 위해 별도로 운영하는 공적 의료보장제도에 이러한 시장 메커니즘을 강화하는 것이 과연 그렇게 ‘필수불가결’한 조치인지 묻고 싶다.
복지부가 필요성이 낮다고 판단한 경증의 외래 이용을 줄이고자 한다면 기존 정액을 일정 수준 인상하는 방안이나, 혹은 문제 삼고 있는 특정 서비스 항목에 국한된 규제책을 검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대신에 모든 수급자에게 일괄 적용되는 본인부담방식을 변경하겠다는 것은 과잉 대응일 뿐 아니라, 이를 빌미로 제도의 기본 취지에 반하는 친시장적 운영 체계를 강화하려는 의도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넷째, 과다의료이용 문제에 대한 책임과 대안을 수급자 측면에서만 찾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치료 개시 여부를 결정하고 치료 수단을 선택할 권한을 가진 의료 공급자 측면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급자 유인 수요’를 억제할 수 있는 공급자 관리 대책과 더불어 이러한 의료기관의 지나친 영리추구 행태를 조장하는 제도적 문제에 대한 근본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될 필요가 있다.
지금 정부가 추진해야 할 정책은 정률제가 아니라 의료급여의 제도적 보장성을 강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러 실태조사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의료급여 수급자의 미충족의료 경험률은 건강보험 가입자에 비해 최소 두 배 이상 높고, 그중 상당부분이 경제적 이유(비급여 진료비와 간병비 등)에서 기인한 것이다. 아울러 건강보험 대비 75% 수준의 낮은 종별가산율과 만성적인 의료급여 진료비 체불 등은 의료기관이 의료급여 환자를 기피하고 차별하도록 만들고 있다.
또한, 정부는 그동안 의료급여 대상자 규모를 전체 인구의 3% 수준에 묶어둔 채 광범위한 의료보장 사각지대 문제를 사실상 방치해왔다. 재정 부담을 이유로 다른 기초생활보장 급여에서는 이미 폐지(또는 대폭 완화)된 부양의무자 기준을 고수하면서 말이다. 소득기준은 충족하지만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의료급여 자격을 얻지 못하는 비수급 빈곤층이 무려 73만 명(2020년)인 것으로 추정되는 실정이다.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가 바로 의료급여 아닌가. 정부는 이제라도 수급자의 건강권 보장에 역행하는 정률제 도입 계획을 철회하고, 최후의 의료안전망으로서 의료급여가 가지는 공적 가치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운영해 나갈 것을 촉구한다.
2024년 11월 19일
비판과대안을위한건강정책학회, 비판과대안을위한사회복지학회, 한국건강형평성학회, 한국사회복지정책학회, 한국사회정책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