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아봐야, 본전이다. 아니 적자이다. 살아가는 비용, 곤궁 등은 너무 크고, 삶의 만족도는 높지 않으니 이것은 적자라할 수밖에 없다. 저출산 등도 비용을 줄이는 위축경제 상태일 뿐이라고 본다. 이글은 의과학보다 인문사회과학에 가까운 글임을 미리 밝힌다.
호주머니가 두둑할때와 비어있을때, 사람들은 자신감의 차이를 쉽게 느낀다. 그런데 여기서 나아가 호주머니 비었을때는 매사에 불안감이 커진다는 것을 아는 것은 겪어본 사람들만이 아는 것같다. 자신감과 조심하는 것이 상대적이라면, 조심하는 이유는 근심 및 불안으로 상대적으로 커진다고 보아야 한다. 포기해서 폭발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세상은 특히 모든게 돈만 있다면, 착각인지 사실인지 잘 모르겠지만, 해결되는 시대로 접어든 듯하다. 그러나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는 사회는 없다. 부자 또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와야하는 말도 맞지만 모두가 용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은 우리가 목표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단적 선택은 말할 것없이 저출산도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양육비용 대비 출산의 효용감으로 미시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있지만, 크게는 삶의 비용 대비 삶의 만족도를 비교하는 거시 수지(?)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인구감소에 지방소멸위기 고취또한 해당 지역서 살기 위한 각종 비용 대비 수익 등의 만족감이 적자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미래의 거시수지가 적자일때, 우리는 불안해진다. 적자에 허덕이는 나를 볼때 우울하고, 그 적자의 원인이 이 세상의 지도자들이나 남, 사회라고 생각할때 분노감에 자신을 태워버리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상반된 이상을 동시에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령 경쟁과 연대의 동시추구는 더워서 차가운 물로, 추워서 뜨거운 물을 트는 우를 정비하는 것이다. 무절제한 경쟁은 개인이 끝없이 외로워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직장에서 짤려도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말대신, 실직자도 빚을 지지 않고 살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라지면 자기가 돌보는 아이를 누가 돌봐줄까, 더 비참해질까 하는 불안은 이미 큰 문제를 저지른 경우가 나왔었다. 이는 연대없는 경쟁 사회에서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