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이야기다. 초등학생을 둔 부모는 자녀 담임선생님을 뵈러 학교에 가야하는데, 빈손으로 찾아가기가 난감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분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애 담임선생님을 뵙고 상담한뒤, 미리 준비해간 돈을 조금 넣은 편지봉투, 이른바 촌지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정중히 거절하며, 지금은 교사들의 봉급도 많이 올라 촌지없이도 잘 살고 있으니 이런걸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언론계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일부 촌지를 거절한 신문사 기자를 모두가 극찬한 일도 있지만, 신념에 의해 촌지를 거절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봉급이 많은, 높은 언론사 기자들이 그런 명예를 가졌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와같은 촌지의 관행이 소득이 높은 선진국일수록 줄어들 것으로 추측한다는 것이다. 그런 논리로 부패 등은 소득이 높을수록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 항간에 도는 소문은 과거 촌지가 성행했던 직종은 봉급을 낮게 책정했다고 한다. 아니 실제 소문이 아니더라도 언론계는 일부 몰지각한 경영자들이 기자들은 밖에서 생기는 돈이 있을테니, 봉급을 적게 준다는 말까지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야 한다. 봉급을 많이 주어서 촌지를 받지 않도록 할 생각을 해보자고 말이다.
시장경제에서 뇌물, 촌지 등 부패는 무엇일까? 돈으로 거래하지 말아야 할것들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행위인 게 상당수다. 교사에 대한 뇌물은 돈으로 거래할 수 없는 성적을 사고파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깊게 생각하면, 정당한 댓가가 합법적으로 부족할때, 그런 촌지나 부패가 발생하기도 한다.
과거에 성행한 의약계의 불법 리베이트는 애초에 댓가의 성격도 분명 있다. 일부 법의식이 없는 의사들은 당시에 약을 많이 써준 의사가 판매 제약사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이 왜 불법이냐고 항변하기도 했었던 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리베이트를 처벌하는 것은 의약분업 당시에 이미 의사들이 의약품 선택과 처방에 의해 수익이 커지거나 작아지는 것을 차단하기로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금은 의약분업이란 급진적인 이상론에 입각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의약품 선택은 의약학적인 요인에 의해서만 선택되도록하고(그러나 사실은 보험과 환자의 경제적 능력 등에 의해 의약하적적만의 선택은 완전히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않는다) 처방권을 거래하지 못하도록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생명이나 신체는 아무리 극단적인 자유시장경제체제라해도, 돈으로 사고팔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돈으로 사고팔수 없는 각종 재화와 권리 등의 용역에 대한 댓가가 사실은 촌지이며 부패(불공정 거래)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다보니, 시대에 따라서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서 촌지는 정상적인 거래와 비합법거래로 분류될지는 달라질수도 있음도 분명하다.
물론 동시에 소득이 높다해도, 부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시장 윤리의식 결여가 크다면 부패는 사라질 수 없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촌지를 받기 때문에 월급을 적게 주어도 된다는 발상을 뒤집어, 월급을 올려주어 촌지를 받지 말도록하자는 인식의 전환을 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참고로, 의약계는 리베이트를 받지 않아도 사회적 지위나 부는 충분히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많다는 것을 고려해, 이런 주장은 의약계를 제외한 여타 분야에 적용되는 말이다.
투기도 마찬가지다. 투기적 수익보다도 건전한 투자와 노동 등의 노력을 통해 부자가 될 수 있고, 더 수익이 크다면, 투기는 상당부분 근절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 국민은 먹을것만 밝히는 개 돼지가 아니라, 생존권적 요구를 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21세기가 시작되며, 개인적인 생각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나무라는 분위기로 전환됐다. 돈을 정당하게 못버는 사람들을 보고 너는 왜 돈을 벌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나무라는 게 태반사였다. 그들이 이런 퇴행적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