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은 아직 어두컴컴한 이른 새벽, 두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어머님. 두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오직 할수 있는건 새벽 기도가 유일하다는 것을 알기에, 매일 거르지 않고 기도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 뒤 시간이 지나면서 하늘은 응답하는듯 창문 틈사이로 한줄기 빛을 들여보내, 어머님의 기도하는 두 손을 밝게 한다. 우주의 기운이 바라는 바가 간절한 부모님에게 전달되는 것일까? 이 글은 의과학보다 인문사회과학에 가까운 글임을 먼저 밝힌다.
속수무책이다. 침몰하는 사회가 속보로 보도되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다음 이어지는 속보를 스마튼폰으로 검색할 뿐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르고 한탄 뿐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싶지만, 가진것이 너무 없어 침몰하는 미래를 바라보면서도 눈물만 흘릴수 밖에 없는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기도를 택한다. 이것이 마지막 남은 희망이다.
그렇게 부족한 우리에게 기도는 치유였다. 아무것도 현실적으로 해줄수 없는 내가, 하늘의 힘을 빌려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돈이 부족한 우리에게 기도한다고 해서, 우주의 기운은 돈을 만들어주지는 않은 것같다. 배달 알바라도 뛴다면 힘이 들지라도 요즘같은 세상에서 돈을 만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도는 할수 있는 것을 다한뒤에도, 부족할때 하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또한 기도로 다른 사람을 움직이는 것보다, 소통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더 우선이다. 말과 행동이 먼저고, 그것이 부족하고 할수 있는것, 내가 줄수 있는것이 없을때 기도를 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는 할 수 있는게 없다. 속수무책이다. 촛불까지 들었지만, 이제 남은건 그게 그거지라는 거대한 절망감에 빠져들 위기에 직면하고 있진 않을까?
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기 전에 스스로를 위한 행위임은 분명하다. 설령 남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은 먼저 자기 자신이 남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었다는 책임을 다하는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우리는 아직까지, 영적인 세계와 물질 세계의 관계를 완전히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마치 자연과학에서, 물질 세계와 힘의 세계를 구분해서, 힘은 무엇이고, 어디서 나오는지가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정신 세계가 무엇이고 어디서 나오는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기껏 두뇌작용이 우리의 신체적 보호를 위한 작용 정도로 받아들일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다 하더라도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말과 행동 뒤에 최후의 보루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 자신과의 소통이며, 아직까진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