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때문에 가난 등 경제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경제사회적인 문제가 정신 질환 등의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개의 보험 등 사회보장 정책이 질병이나 노후 등에 경제사회적인 안정을 보장하는 것에 집중돼 있다. 경제사회적인 보장을 우선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다. 이글은 재차 밝히지만, 의과학보다 인문 사회에 가까운 글이다.
그러나 경제사회적인 안정을 통해, 정신질환 예방 및 치료 등 건강한 삶을 보장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에, 여러 정신의학과 등의 정신질환 관련 의료기관은 사회복지사 등과 연계를 통한 정신질환자들을 의약학적 치료와 사회경제적인 보장을 동시에 추진하는 게 치료와 사회복귀 효과를 키우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부는 정신과를 방문한 환자를 경찰 등에서 연계해 관리하자는 주장을 낸 바 있지만, 오히려 정신과를 방문하지 않은 정신질환자를 찾아내고 관리하는 게 더 범죄예방에 효과적이며, 정신과를 방문한 환자는 사회복지 체계와 연계되도록 하는게 타당하다는 생각이다.
그나마 치료받는 환자들마저도 치료를 꺼리게 하는 우는 범하지 않는 게 옳다.
어쨌든 사회 복지가 정신질환자의 주요한 치료 및 정상적인 사회복귀를 인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실업과 빈곤, 각종 실패 등의 위험및 위기에서 정신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회적인 연대와 협력에 있다.
맹목적인 경쟁체제에서의 외로움과 개인주의 경향은 정신건강에 크게 해롭다. 직장에서 짤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자신이 잘린다해도 회사의 시계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지체없이 잘돌아가고 잇다는 것을 느낀 사람은 일 개인의 미천함과 아무도 자신의 고통을 함께 해줄수 없다는 고독함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 세상을 물러날 때도, 세상의 시계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우린 대신 아파해줄 수는 없지만, 대신 일해줄 수는 있다. 서로간의 협력과 연대를 통해 우리의 많은 고통의 짐은 다소 덜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가진 부모가 이 냉혹할 것으로 생각하는 세상에 자신이 없다면, 누가 아이를 돌봐줄지 하는 걱정으로 자신을 살해하기 전에 아이를 먼저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나 하는 기사가 간혹 눈에 띈다. 역시 마찬가지로, 해당 부모가 대신 죽을 수는 없지만, 고아가 된 아이를 사회가 잘 돌봐줄것이란 생각이 든다면, 자신을 포함해 아이까지 살해하는 경우는 줄어들지도 모른다.
특히 근대 이후 물질 문명이 확실히 자리잡은 시대에 들어서며 의과학이 많은 질환 의 원인을 주로 물질과 측정가능한 힘에서 찾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주변이나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인간과 사회관계 및 정보에 의해서 질환이 발생한 듯한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물론 증명할 수 없지만, 과학에서는 재현이 가능하면 증명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생각하며 물질과 측정가능한 힘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정신적인 관계 및 정보 문제로 정신건강의 이상을 호소한다면 이를 인정해야한다.
일부 정신 및 신체질환마저도 많은 이가 마음의 병이라고 생각하는데, 굳이 이를 신체적 질환이라고 보아야만 하는지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특히 가난 자체보다도 상대적 가난이 더 고통스러운 것임을 생각해보면 더욱 자명하다. 따라서 당연히 치료도 물질 중심에서 찾는것보다, 관계나 정보 등 사회경제적인 방법을 찾는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동물들이 음악에 번식을 늘리거나 반응하는 것을 보면, 소음과 음악은 소리는 소리지만, 같은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본다.